2014 갑오년(甲午年)의 첫 詩로 靑馬 유치환 詩人(1908~1967)의 ‘행복’을 선정했다. 이유는 눈치채신 것과 같이 詩人의 호(號) 때문이다. 사실 ‘행복’의 배경인 통영서 돌팔이질 하는 친우 최의원 말에 따르면, 60갑자를 이용해 매 해를 부르는 이름은 명리학에서 천명한 것과 같이 입춘(立春)을 기준으로 바뀌기 때문에 금년도 입춘인 2월 4일이 오기 전에는 올해를 靑馬之年이라 부를 수 없다. 하지만 언론에서 하도 떠들어대다보니 자연스레 靑馬 유치환 詩人을 연상하게 되었다. 푸른 말. 호(號)처럼 진취적(?)이고 활발한 사랑을 했던 詩人.


학창시절에는 詩人이 어떤 마음으로 ‘행복’을 노래했는지도 모른채, 그저 詩人이 청록파네 어쩌네 하는 수험용 배경만 머리에 담고서 ‘행복’이 전해주는 노랫말의 아름다움에만 취해 있었다. 마치 짝사랑이라는 열병을 앓던 소년처럼. 사랑받지 못해도 그저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그/그녀에게 보낼 사소한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끄적일 때 갖는 마음. 그 마음을 이해한다 믿었기에 난 그저 ‘행복’을 읽고, 베끼고, 공감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세월을 시간과 함께 흘러온 지금, 조금은 세상살이의 고단함도 맛보고, 연인 사이를 지나는 감정의 흐름도 느낄 수 있게된 지금의 내가 다시 읊어본 ‘행복’은 솔직히 마음 한 켠에 부끄러움을 담게 만든다. 나 또한 그저 길거리에 흔한 사회적 도덕의 노예이기 때문일까?


별스럽게 소개했지만, 이 詩는 詩人이 사랑하는 이에게 보낼 연서를 쓴 뒤, 그것을 보내기 위해 우체국에 들리는 자신의 들 뜬 마음을 묘사한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는 그저 詩를 읽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詩라는 것이 늘 그렇듯 ‘행복’ 또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행복’이라는 詩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는, 詩人이 작품을 쓰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는게 도움이 되곤 한다. 사실 내게 남의 연애사를 뒤적거리며 사족을 덧붙일 만큼 한가로운 취미는 없지만, 詩的 탐구심으로 잠시 청마의 사랑을 돌이켜볼까 한다. 


詩人은 거리에 흔한 나같은 사회적 도덕의 노예들과 달리, 결혼 후 다른 여자와 연애를 했다. 그렇다. 이혼이 아닌 결혼 '후'다. 그것이 바람이었는지, TV속 연예인을 향한 동경의 눈길과 같은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詩人은 부인이 곁에 있음에도, 부인이 아닌 여성을 향한 사랑을 노래했고, 그 과정이 담긴 詩가 바로 ‘행복’이다. 


詩人은 1947년, 불혹을 한 해 앞둔 나이에 본인이 근무하던 학교로 부임한 29세의 미망인이자 시조시인 이영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처자가 엄연히 살아있는 유부남이, 근무지에 부임한 미망인 선생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연애가 흔하고 넘치는 오늘날에도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소재로 부족함 없는 소재인데, 70여년 전에는 오죽했으랴. 그것도 훗날 교장까지 지낸 교육자의 신분으로. 하지만 시인은 당당히 - 그 자신감의 근원은 모르겠지만 - 시조시인 이영도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 증거로, 3여년 간의 구애 끝에 연인으로 발전한 새로운 연인에게  詩人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약 20여 년 동안 5,000여 통의 편지를 보냈다.


20년. 그리고 5,000통. 

사흘에 두 편은 족히 써야하는 분량이다. 

잠시, 그 열정에 묵념.


5,000여 편의 연서가 모두 행복과 같이 우수한 작품성을 가졌는지, 혹은 그에 필적할만한 장편의 글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詩人께서 작고한 뒤에 그 중 200여 편을 추리고, 오늘 소개한 '행복'의 한 구절을 따 이름지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유고시집이 나온 것을 보면, 적어도 그 중 200여 편은 우수한 작품이었으며 월간 윤종신 처럼, 창작의 고통이 수반될 만한 작품을 적어도 한 달에 한 편 씩은 지으셨다는 단순 무식한 계산이 가능하다. 靑馬 유치환 선생이 아니라, 多作 유치환 선생으로 불러야 하는 것일까.


불륜. 하지만 당당한.


많은 세월이 흐른 뒤의 타인이 보기에도 어울리기 힘든 단어라 생각되지만, 남겨진 흔적만으로 유추하였을 때 사랑의 당사자인 두 사람만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아름답고 풋풋한 고백이 어디 있을까. 이문당에서 연인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정성스레 담은 연서를 고이 접어, 맞은편 통영 우체국에서 부치는 자신의 행복한 모습을 묘사한 시. 불혹이 훌쩍 넘은 나이에 이토록 소년과 같이 순수한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이가 또 있을까. 한 여이을 사랑하는 남자로서 반성이 필요한 대목같다. ^^;


유치환과 이영도. 그 두 분의 마음을 지금와 내가 알 길은 없지만, 열열한 사랑이었음은 '행복'이라는 詩 한 편 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분들 외에도 사의 찬미*라는 노래와 불륜, 동반자살로 유명세를 탔던 윤심덕과 김우진의 경우도 그렇고, 문학이나 예술을 하는 분들 중에는 간혹 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많은 연인을 찾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사랑을 노래하고 표현하던 이들에겐 남들보다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가슴에서 넘치는 사랑을 글로, 예술로 표현해버리고 나면 공허함이 찾아와.. 그 공백을 메워줄 또 다른 사랑을 찾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 요즘 젊은 이들은 불후의 명곡에서 바다가 부른 '사의 찬미'를 들은 것이 첫 경험일 것이다. 난 사실 이전에 이 노래를 들은 적이 있었고, 막연하게나마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바다가 불후의 명곡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공중파에서 불륜을 담은 노래를 버젓이 불러도 되는걸까 하고 말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사회적 도덕의 노예가 맞는 것 같다.


Posted by ☆ 헤는 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