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들어, 근래 잘 듣지 않던 구정이라는 말이 다시금 들려와 몇 자 적어봅니다.
설날은 추석, 한식, 단오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유의 4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여기서 '우리'나라라고 했습니다. '저희'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이 글을 보시는 분 중에 한글을 알되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와 같은 나라를 조국이라 생각하는 분들을 주 독자라고 생각하니까, 여러분들께 말할때는 '우리'나라 입니다.)
애시당초 서양 문물이 전래되기 전에는 달력이라는 놈이 현재 부르는 말로 음력달력 뿐이었으니 아무 문제가 없이 설날은 '설날'이었습니다.
문제는 조선 말 양력이 도입되면서 서서히 싹이 트기 시작합니다. 초기에는 일부 개화파가 양력의 사용을 주장했음에도, 국민적 정서에 힘입어 1894년 갑오개혁까지는 설날은 음력 1.1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1895년에 을미개혁이 단행되고,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1896년부터 정식으로 양력 1.1을 설(양력설)로 지정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풍조는 양력은 서양 오랑캐의 문화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새로 만들어진 설(양력설)은 '오랑캐의 명절'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이었고, 명절로 인지하고 양력설을 쇠는 사람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듣보잡 수준이던 양력의 첫 날을 의미있는 명절로써 설이라 부르게 강제한 것은 일제가 만든 조선총독부였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말살을 위해 정신의 근간인 명절을 부정하고, 일본의 명절을 지낼 것을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탄압받은 것이 설날이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착된 일본의 풍습대로 양력 첫날인 1월 1일을 새로운 설날이라는 의미로 신정이라 부르고, 우리네 설날을 구정으로 부르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해가 바뀐 1911년 1월 1일을 신정으로 부르면서 명절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한편, 조선의 설날(음력1.1)을 지우기 위해 1주일 전부터 방아간 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등의 탄압 정책을 폅니다.
하지만 민중들은 양력설을 '왜놈 설'이라고 부르면서 음력설을 고집합니다. 그 결과는 더욱 세찬 일본의 핍박뿐이었지만,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냈습니다. 우리 조상님들께서는.
독립 후에도, 일제의 잔재를 안은 채 출발한 자유당 정권은, 신정을 공휴일로 지정하였습니다.
1949년 공휴일 제정 당시 양력 1월 1일부터 3일까지 연휴를 지정하고, 휴무일을 줄이고 낭비를 억제해야한다는 논리로 음력설인 설날은 달력에서 아예 파버리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휴일이 아님은 물론이고, 아예 구정이라는 말조차 빼버린 것이지요.
이승만의 하야 이후 정권을 잡은 인물은 요즘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이분은 대한민국 근대화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메이지 유신을 첫손에 꼽으셨던만큼, 음력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승만과 박정희 사이에서 유일하게 정통성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윤보선 대통령께서는, 자유당이 시원하게 말아버린 나라를 바로잡기 바쁘셔서 설날은 신경을 못쓰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경제활동을 위해 도시로 나아갔던 사람들이 설(음력 1.1)만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통에 전국의 도로가 차로 메워지곤 했고, 설날 겪는 교통대란을 '민족의 대 이동'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군장성 출신으로 스타성이 강하셔서 대중에게 인기를 끌 수 있는 정책에는 비상했던, 청빈하신 29만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이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모양새를 보면 사실 원해서 하신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29만 전두환 대통령의 5공 정부는 1985년에 음력 1월 1일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달력에 설날의 존재를 부활시켰습니다. 덤으로, 민속의 날 당일만은 공휴일로 지정해주었고요.
그 다음 주자이자, 물통이네 No통이네 했던 노태우 대통령은 친우 29만 전두환 대통령이 물러나는 모양새를 잘 지켜보았고, 그래서인지 좀 더 민중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은 해주신 갓 같았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1989년 달력에 설날을 제대로 '설'이라고 명명하고, 앞 뒷날을 포함하여 총 3일의 연휴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추가되는 설날의 연휴를 만들기 위해 이전에 3일 쉬던 양력설 휴일을 하루 줄여 이틀만 쉬게 되었고요. (덕분에 저는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는 설이라는 이름으로 총 5일이나 학교를 빠질 권리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만.. 방학이라 무의미했습니다. 쳇..)
뭐 이후는 알고계시다시피(물론 앞에 말씀드린 갓들도 다 알고 계셨겠지만) 김대중 대통령께서 1999년에 양력설을 하루 더 줄여 지금의 형태가 되었지요.
즉, 양력 1월 1일도 설이고, 음력 1월 1일고 설날이고, 둘 다 국가가 공휴일로 인정하는 날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얘기한 것들은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둘 다 공휴일이고 빨간날이고 학교를 안가도 되는 날이고, 회사 안가도 정규직은 월급을 받는 날인데도 이게 뭔소린고 하니..
대한민국에서 법으로 정해진 특별한 날은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언급된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뿐이며, 이 네 날만 법률에 의거하여 보장받는 공식적인 휴일입니다.
설날 등등의 소위 말하는 빨간날들은 대통령령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서 정의되어있습니다.
따라서 당신께서 설날을 구정으로 부르던, 빨간날로 부르던, 한낱 '행인1191,0058'과 다를바 없는 저따위가 너님에게 간섭할 근거가 부족합니다.
글로벌 시대에 이런 편협하고 꽁한 마음을 갖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원래 우리네 민족이 부르던 이름이 멀쩡히 남아있음에도, 우리 민족을 핍박하던 이들이 지어준 이름으로 설날을 부르는 것은 조금 슬프단 생각이 들어 긴 글을 적었습니다.
(사실, 제가 다니는 회사는 민족을 강조하고 국민적 기대에 부응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기업인데, 그런 회사에서 만들어 배포한 달력에 '신정'이 버젓이 찍혀있는 것이 서글펐던 것도, 제가 열을 내며 이 글을 쓴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사실 길가다 만난 아무개가 공공재를 뭐라고 부르든 별로 상관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만, 그날만 되면 안입던 한복도 꺼내보고 삶을 핑계로 만나지 못하던 가족들에게 먼 길 달려 모여 앉는 기분 좋은 날인데, 이왕 부르는 것, 남이 시켜서 쓰던 이름말고 우리네가 원래부터 부르던 말 그대로 '설날' 이라고 하는 것은 어떨런지요?
그리고 홀로 외로운 휴일인 양력 1월 1일은 양력을 이제 일상력으로 받아들인 만큼 새로운 이름으로, 새튼날(새로 동이 튼 날), 초하루, 새해 초하루, 새해 첫날 같은 말들을 고민해 보아야하지 않을까요.
(지금 언급한 말들은 고증을 거친 것은 아니고, 혼자 지어내본 것들이라 조악하기 그지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매번 정권이 바뀌면 과거 청산이 회자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을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적었던 것이 이닐까 생각해봅니다. 일본에게 요구해야할 것은 당당히 요구하되, 우리 스스로가 과거을 이겨내고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면 우리나라의 목소리에 더큰 설득력이 생기겠지요.
2013년 새해에는 작심 삼일하지 말자고 작심하며, 길었던 글을 마무리합니다. 긴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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